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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스카의 "비판적 실재론" 중 "실재론"부분에 대한 부연설명을 하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고 쓰여진 요약글이다. 이하 모든 내용은 위 책에서 발췌 및 인용되었음을 밝힌다)


2장:자연과학에서의 실재론에 관하여(Realism in the Natural Sciences)


1. 근래 과학철학계의 논쟁


과학이 그 발전에 있어서 일원적이며(monistic) 연역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전제를 토대로한 실증주의적 세계관은 처참히 부서졌다. 그러나 그 이후 등장한 여러 대안들은 과학적 변화나 이론의 비연역적 요소에 대한 설명을 하는데 있어 합리성, 심지어 이해성(intelligibility)조차 일관적으로 유지하지 못하였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과학철학은 새로운 인식론의 등장으로 인해 다시 이전으로 되돌아 갈 수 없으나, 새로운 존재론 없이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긴장관계는 반실증주의의 두 축인 반일원론 및 반연역론 사이에서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Bachelard, Popper, Lakatos, Feyerabend와 같은 학자들로 대표되는 반일원론적 흐름을 먼저 살펴보자. Kuhn 및 Feyerabend 모두 통약불가능한 설명간의 충돌의 개념 및 어떤 것에 대하여 그러한 설명들이 충돌하는지에 대한 개념의 이해성(intelligibility)을 유지하지 못한다. Popper은 자연이 균일하지 않은 이상, 추측에 대한 반증이 어떻게 합리적일 수 있는지 보여주지 못하였다. 또한 Lakatos도 자연이 균일하지 않은 이상, 퇴행하는 프로그램 대신 진보하는 프로그램을 연구하는 것이 어떻게 합리적일 수 있는지 보여주지 못하였다. 보다 일반적으로, 과학적 변천를 연구하는 이론가들은 불연속적인 현상들(phenomena)을 성장과 변화가 동시에 존재하는, 진보적이고 점진적인 성격을 가진 것처럼 보이는 과학적 발전과 조화시키는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반연역론적 흐름 또한 비슷한 문제를 가지고 있다. Wittgenstein의 초기 영향을 받은 Hanson, Toulmin, Hesse, Harre와 같은 학자들은 과학적 실행들이 감각경험에 대한 통사론적인 작용으로 환원될 수 없으며, 한 이론의 이해도(intelligibility)와 경험적 연장에 있어 필수적인 인지적인 대상들-패러다임, 휴리스틱, 스키마, 모델, 혹은 이상 등-을 만들어낸다는 것을 보여주려 하였다. 그러한 대상들은 자연적 필요성에 대한 대체물로서 작용한다. 그러나 이의 문제점은 다음과 같다: 만약 대체물이 경험적으로 묘사될 수 있다면, 이의 가정(postulation)들은 정당하나 그러한 대체물이 독립적인 역할을 더이상 수행하지 못하기 때문에 연결의 필요성, 모델의 유비적 성격, 질서의 이상성, 혹은 그 무엇이든, 사라지게 된다. 역으로, 만약 대체물이 경험적으로 묘사될 수 없다면, 대체물의 인지적인 기능은 유지되나 이는 더이상 어떠한 현실적 현상의 성격도 설명하지 못하게 된다. 보다 일반적으로, 위 전통의 이론가들은 과학적 상상력의 합성적(synthesizing) 활동를 강조하였으나, 그 반대급부로서 균형을 맞추기 위해 필요한 과학과 자연의 복잡다분한 인과적 상호작용에 대한 설명을 하는데 있어서는 미흡하였다.   


결국 반일원론과 반연역론의 합리적 통찰이 모두 살아남기 위해서는 새로운 존재론이 필요하다. 그러한 존재론은 자연속에서 인류의 위치에 대한 철학적인 관념에 있어 반인간중심적인 전환, 즉 일종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 필요한 것이다.   


2. 실재론의 종류(Types of Realism)


실재론이란 과학의 궁극적인 연구대상이 과학자들 및 그들의 활동과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행동한다는 것이다. 바스카가 여기서 주장하고 싶은 바는 형이상학적 실재론으로서, 어떠한 과학적 탐구도 일어나기 이전에 세계는 어떠할지, 그리고 어떠한 과학적 행위가 가능하기 위해서 어떤 조건들이 필요한지에 대해 상술하려 한다. 결국 실재론이란 한 대상-인간의 행위(감각경험 및 사고)와 독립적으로 존재하며 행동하는-에 대한 지식이 아닌 존재의 성격에 대한 이론이며 이러한 의미에서 경험론, 합리론, 그리고 특히 포스트-흄 철학, 즉 바스카가 인식론적 오류(epistemic fallacy)라고 칭하는-존재론적 물음들이 인식론적 형태로 변환될 수 있다는, 즉 존재에 대한 명제가 존재에 대한 우리의 지식에 관한 명제들로 분석될 수 있다는, 다른 말로 철학이 '네트워크만 다루고 네트워크가 묘사하는 것을 다루지 않는'것으로 충분하다는- 사조와 대척점에 있다. 


대상에 대한 지식에 관한 이론이 지식의 대상에 관한 이론을 수반한다는 사실은 명확하다. 즉, 모든 과학적 지식에 관한 이론은 그러한 지식이 가능하기 위해서 세계가 어때야 하는지에 대한 이론을 전제해야한다. 따라서, 만약 어떠한 철학자가 과학 법칙을 사건들의 동시발생(conjunction)으로 분석한다면, 그는 그러한 사건의 동시발생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전제하는 것이다. Bachelard가 말하였듯이 모든 철학은 "명시적으로 혹은 암묵적으로...현실(reality)를 전제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에게 남은 유일하게 중요한 물음은 실재론적 원칙이 얼마 만큼 혹은 어느 형태로 수행되는 것인가의 여부이다. 흄과 칸트를 포함하는 전통 과학 철학은 암묵적인 존재론으로서 경험적 실재론(empirical realism)-과학 연구의 대상은 우리가 실재적으로 혹은 가능적으로 경험할 수 있다는-에 의지해왔다. 한편, 초관념론(super-idealism)은 보다 근래에 와서 암묵적인 실재론으로서 주관-개념적실재론(subjective conceptual realism)-과학 연구의 대상은 과학 이론의 산물이라는-을 탄생시켰다. 그러나 바스카는 오직 위에 상술한 실재론의 정의(원칙)와 부합하는 실재론, 즉 초월적 실재론(transcendental realism)만이 실험 및 이론 과학적 성과들에 대한 이해도(intelligibility)를 유지시켜줄 수 있다고 본다.  


우선 경험론자들의 주장을 살펴보자. 경험론자에게는 실험 활동은 인과적 법칙과 일반적 지식을 확립하기 위한 필요조건이자 충분조건이다. 그리고 이러한 인과적 법칙과 지식들은 사건의 일관적인 동시발생(conjunction)으로서 분석된다. 이러한 분석이 잘못됬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실험에서 과학자들은 어떠한 사건의 패턴을 공동결정하거나 인과적으로 공동책임을 가지고 있다. 과학자들이 자신들이 통제하는 조건들 하에서 의도적으로 만들어내는 패턴들이 중요한 이유는 자신들이 만들어내지 않는 구조, 메커니즘, 원리의 운용방식을 파악할 수 있도록 하기 때문이다. 과학자들이 만들어 낼 수 있는 현상들 중에서 과학자들이 실재적으로 만들어 내는 현상들을 특징짓는 것은 그들의 실험이 성공적일 때 이는 그들이 만들어내지 않는 에 대한 지표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인과적 법칙과 같은 실험적 연구의 대상과 사건의 패턴간의 실재적인 차이점은 실험 행위의 이해도(intelligibility)의 조건이다.  일관적인 동시발생(conjunction)은 일반적으로 인위적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만약 우리가 인과적 법칙을 이를 통해 확인한다면, 우리는 과학자들이 실험 행위를 통해 자연 법칙을 야기하고, 심지어는 변화시킨다는 터무니없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따라서 실험에서 과학적 연구 대상은 사건과 이들의 동시발생이 될 수 없고, 일반적으로 이들(사건과 이들의 동시발생)과 어긋나는 구조, 생성적인 메커니즘 등이여야한다. (인과적인 법칙의 실재적 기반이 되는)  


그러나 우리는 단지 실험적으로 정립하는 것 뿐만아니라 열려있다고 규정될 수 있는, 즉 일관적인 동시발생이 일반적으로 확립될 수 없는 체계에 우리의 지식을 적용한다. 만약 이러한 적용에 이해도가 있게 되려면(rendered intelligible),  인과법칙은 '보유하나 실행되지 않고 실행되었으나 실현되지 않을 수 있으며 실현되었으나 어느 누구에게도 지각되지 않을 수 있는' 경향성(tendencies)으로서 분석되어야 한다. 따라서 법칙을 언급할 때 우리는 메커니즘들의 초사실적(transfactual)[각주:1] 활동을 말하는 것이며, 실제적인 결과에 대해서 어떠한 주장을 하는 것은 아니다(실제적 결과는 다른 메커니즘의 효과들과 함께 공동으로 결정될 것이다). 여기서도, 인과적 법칙과 사건의 패턴 사이의 존재론적 차이점을 구별하지 못하는 것은 터무니 없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만약 인과적 법칙이 일관적 동시발생이라면 우리는 열린 체계에서 현상을 주관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물어야 한다. 경험론자들은 아무것도 현상을 주관하지 않는다는, 따라서 자연이 근본적으로 비결정적이라는 결론에 이르거나, 과학이 아직 어떠한 법칙도 발견해내지 못햇다는 주장에 이르러야하는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인과적 법칙과 사건의 패턴 사이의 존재론적인 차이점을 정립한다면 이는 우리로 하여금 사건의 패턴의 가변성에도 불구하고 인과법칙의 보편성을 유지할 수 있게끔한다. 결국, 만약 우리의 지식의 대상이 그 대상에 대한 지식과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행동한다면(자동적 차원) 우리가 보유하고 있는 지식은 항상 역사-구체성을 띤 사회적 형태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미 정립되어 있는 자동적(intransitive) 차원 혹은 존재론을 보완하기 위하여 타동적(transitive) 차원 혹은 인식론을 구성할 필요가 있다. 


다시 경험론자들의 주장으로 돌아가보자. 경험적 실재론은 과학적 행위를 실제적인 노동이 아닌, 지적인 노동, 즉 자연과의 인과적인 교류로서만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지식을 일시적인 사회적 산물로 바라보지 못한다. 이는 경험적 실재론의 층화되지 않은 존재론이 개인들을 능동적이지 않고, 수동적으로 주어진 사실들을 자각하고 일관적인 동시발생을 기록한다고 가정하는 개인주의적 사회학을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간중심적 사고관이 외면하는 것은 그러한 법칙들을 알기 위해 필요한 의식적 인간의 행위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흄의 이론은 동시발생이 이에 필요한 인간의 행위와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관점, 따라서 결합된 사건들이 발생하는 시스템에 대한 물신주의(fetishism)에 의존하고 있다. 또한 흄의 이론은 직접적 감각경험을 통해 얻은 것을 원자론적인 사건을 구성하는 사실로서 인식하는, 그러면서 이를 위해 필요한 인간 행동과 독립적이라고 상정하는, 따라서 원자화된 사실의 물화(reification)에 의존하고 있다. 결국 지식의 인간의존성(지식의 사회적 성격)과 세계의 인간독립성(세계의 초월적이며 실재론적인 성격)은 경험적 실재론에서는 세계의 인간의존성(세계의 경험적 성격)과 지식의 행위독립성(지식의 몰사회적인 성격)으로 변환된다. 


정리하자면, 자연과학에 대한 세가지 주요한 철학적 입장이 존재한다. 경험론의 입장에서 자연적 질서는 경험하에서 주어진 것이다. 관념론의 입장에서 자연적 질서는 우리가 만들거나 구성하는 것이다.  실재론적 입장에서 자연적 질서는 자연에 대한 우리의 인과적 탐구의 전제로서 주어진 것이나, 자연적 질서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이다.  실재론의 입장에서는 대상의 성질이 그 대상의 (우리한테의) 인지적 가능성을 결정하는 것이며, 인류야말로 자연속에서의 조건적인 현상이며 지식은 우연적인 것이다. 초월적 실재론만이 인류를 자연 속에 위치시킴으로서 과학(혹은 철학)그 자체의 역사적 발생 및 인과적 탐구와 합치된다.   

  1. 초사실적(Transfactual): 인과 법칙이 초사실적이라고 칭해지는 이유는 그들이 인간에 의해 구성된 닫힌 체계 속에서 표현될 수 있음에도 열린 쳬게 속에서는 다른 양상을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https://centreforcriticalrealism.com/about-critical-realism/basic-critical-realism/)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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